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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애니감상

반딧불이의 묘 (1988)

by 망고래빗 2019. 6. 13.

감독 타카하타 이사오

제작 스튜디오지브리



ⓒ新潮社

 

한 때 나의 3대 애니메이션은 중국의 테웨이 감독 작품 <피리부는 목동>, 캐나다의 프레데릭 백 감독 작품 <나무를 심는 남자> 그리고 일본의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 작품 <반딧불이의 묘>였다.

그 정도로 이 작품을 좋아했다. 지금도 좋아한다. 처음으로 갖게 된 비디오테이프였으니까.

 

이 작품은 “1945년 9월 21일 나는 죽었다”라는 충격적인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사후의 주인공 남매가 생전의 모습을 바라보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 구분은 화풍(畵風)으로 이뤄진다.

 

일반적으로 관객들은 사람이 직접 연기하는 실사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릴지언정 그림이 움직이는 만화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만화영화를 보며 감동도 받지 않는다. 저 연령층의 관객이 아닌 이상은.

그렇지만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 아주 드문 작품이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감독의 연출력과, 캐릭터의 움직임, 그리고 성우의 연기력으로 3박자가 고루 갖췄기 때문이다. 특히 주인공 세츠코의 목소리를 맡은 성우는 실제 캐릭터의 나이와 비슷해 당시 만6세로 세계 최연소 성우라는 기록을 보유했었다.

 

<반딧불이의 묘>은 일본 내의 일부 평론가들이 그 묘사의 정확함으로 인해 싫어했다고 한다. 상처가 난 곳에 손을 넣어서 휘젓는 것만큼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관객을 끌어당기는 묘사를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느낄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영상의 표현이 너무 훌륭해 야유 아닌 야유를 보낸 것이다. 특히 폭탄이 떨어지는 장면은 실사로는 불가능한 연출이라고 할 정도로 그 분위기를 잘 전달해준 것 같다.

 

국내에서는 이 작품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으로 그려져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 남매는 분명히 전쟁에 대한 피해자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나라와 정부가 가해자인 것이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겠지만, 나는 영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영화를 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타카하타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의 나라가 피해국가라고 주장하면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도 순수하게 반전영화로 만들었는데 우연히도 그렇게 해석되어진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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